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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6-09-30 0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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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귀스트 르누아르, ‘폴 뒤랑-뤼엘’. /위키피디아 오귀스트 르누아르, ‘부지발의 무도회’. /위키피디아 2019년 5월, 뉴욕 소더비 경매에 오른 클로드 모네의 ‘건초더미(Meules)’ 한 。이 낙찰가 1억1070만달러(약 1490억원)를 기록했다. ‘인상파’ 회화가 1억달러의 문턱을 넘은 첫 기록이었다. 흔히 ‘건초더미’로 불리지만, 실은 수확한 곡물을 쌓아 둔 낟가리를 시간과 빛에 따라 그린 연작 가운데 하나다. 지금은 값을 매기기 어려운 인상파 그림이 되었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인상파가 태어난 무대는 오스만 남작이 새로 지어올린 근대 파리였으나, 정작 파리 화단은 그 당시 이들을 싸늘하게 외면했다. 인상파라는 이름부터가 1874년 비평가 루이 르루아가 모네의 ‘인상, 해돋이’를 조롱하며 쓴 말에서 굳어졌다. 조롱거리에 지나지 않던 그림이 어떻게 세계인이 사랑하는 명작이 됐을까. 마네의 화실을 통째로 사들이다 미술상 폴 뒤랑뤼엘(Paul Durand-Ruel, 1831~1922)이 모네, 피사로와 처음 마주친 것은 1870~71년 런던에서였다.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전쟁과 뒤이은 혼란을 피해 세 사람 모두 런던에 머물던 때였다. 이듬해 파리로 돌아온 그는 화가 알프레드 스테방스의 화실에서 에두아르 마네의 그림을 처음 보고 단박에 매료되었고, 이튿날 곧장 마네의 화실을 찾아가 그곳에 있던 23. 모두를 화가가 부르는 값 그대로 사들였다. 바다이야기예시 ‘피리 부는 소년’을 비롯한 마네의 주요 작품도 이 무렵 뒤랑뤼엘의 손을 거쳤다. 살롱에서 낙선하고 세간의 비웃음을 사던 작품이었지만, 그는 마네에게서 다가올 미술의 방향을 읽어냈다. 마네를 향한 이런 신뢰는 곧 다른 화가에게도 이어져 모네, 르누아르, 시슬레, 드가, 모리소가 차례로 그의 화랑을 드나들었다. 그는 그림값을 선불로 치르고 화가가 궁할 때마다 돈을 부쳐, 오직 붓 드는 일에만 매달릴 수 있게 했다. 이렇게 뒤랑뤼엘이 사들인 인상파와 그 주변 작가의 작품은 약 1만2000.에 이르렀다. 모네 1000。, 르누아르 1500., 드가 400., 피사로 800., 마네 200。 그리고 미국인 화가 메리 카사트의 작품도 400.에 달했다. 문제는 사들이기만 할 뿐 좀처럼 팔 수가 없었다는 데 있었다. 방대한 소장품은 고스란히 큰 빚으로 쌓였고, 1880년대 중반 뒤랑뤼엘은 팔리지 않는 걸작에 파묻힌 채 파산의 문턱까지 내몰렸다. 뒤랑뤼엘, 파산 직전 289. 싣고 뉴욕행 뜻밖의 구원은 대서양 건너 미국에서 왔다. 철도와 산업으로 막대한 부를 쌓은 신흥 부유층이 유럽 미술을 사들이던, 이른바 도금 시대의 미국이었다. 1886년, 뉴욕의 미국미술협회가 운송과 보험 비용을 부담하고 광고까지 맡겠다며 전시를 제안했다. 뒤랑뤼엘은 소장품 289.을 배에 실어 바다를 건넜다. 오리지날바다게임 그해 4월 ‘파리 인상주의 화가의 유화와 파스텔’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연 이 전시는 반응이 좋아, 곧 뉴욕의 내셔널 아카데미 오브 디자인으로 자리를 옮겨 이어졌다. 289. 가운데 미국 관객과 비평가의 눈길을 사로잡은 작품은 뚜렷했다. 먼저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무도회’ 연작이었다. 특히 야외에서 왈츠를 추는 남녀를 그린 ‘부지발의 무도회’는 생동하는 색채로 현지의 찬사를 받았다. 마네의 대작도 화제를 모았다. 미국 남북전쟁의 두 군함이 맞붙은 실제 해전을 그린 ‘키어사지호와 앨라배마호의 해전’은 거칠고 웅장한 바다 묘사로 특히 주목받았다. 인상파의 대표적 여성 화가 베르트 모리조의 ‘화장하는 여인’ 역시 전시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 가운데 하나로 호평받았다. 흥미로운 것은 찬사와 판매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았다는 .이다. 289. 가운데 실제로 팔린 것은 49。 남짓이었고, 대부분 모네의 작품이었다. 불타는 듯한 주황빛 단풍이 센강 위에 어리는 ‘아르장퇴유의 가을’이 그때 새 주인을 찾은 대표적 그림이다. 이 전시를 계기로 열린 미국 시장은 훗날 미국 주요 미술관의 인상주의 컬렉션이 형성되는 중요한 토대가 됐다. 뒤랑뤼엘은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미국이 아니었다면 그 많은 모네와 르누아르를 사들인 나는 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1886년 그곳에서 연 두 차례 전시가 나를 구했다.” 뒤늦은 재평가, 파리로 돌아온 인상주의 (왼)클로드 모네, ‘건초더미’. 바다이야기 게임 다운로드 (오)클로드 모네, ‘아르장퇴유의 가을’. /위키피디아 이 성공은 마침내 프랑스에서도 인상파가재평가받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에서 인상파 그림이 제값을 인정받았다는 소식은 20년 넘게 이들을 외면해 온 프랑스 수집가의 뒤늦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특정 화가의 작품을 대량으로 선매해 장기간 전속에 가깝게 관리하고, 단체전이 주도하던 시절에 개인전을 열고, 런던·브뤼셀·뉴욕에 지.을 두어 화랑망을 넓힌 뒤랑뤼엘의 방식은 오늘날 미술 시장의 골격이 됐다. 세상을 떠나기 두 해 전인 1920년, 89세의 뒤랑뤼엘은 지난 세월을 이렇게 회고했다. “마침내 인상파 거장이 승리했다. 나의 광기는 결국 지혜였던 것이다.” 모네는 훗날 “뒤랑뤼엘이 없었다면 우리 인상주의자는 모두 굶어 죽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2015년 런던 내셔널갤러리는 그를 기리는 대규모 전시의 제목을 ‘인상주의의 발명(Inventing Impressionism)’으로 붙였다. 조롱받던 빛의 그림이 세계인이 사랑하는 인류의 유산으로 남기까지, 그 길을 처음 연 것은 한 미술상의 눈이었다. 남이 보지 못한 가치를 먼저 알아본 그의 안목이 새로운 시장을 열었고, 그 확신이 인상주의라는 또 하나의 세계를 세웠다. 격변의 인공지능(AI)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이 이야기는 울림을 남긴다. 무엇이 진짜 가치로 살아남을지 누구도 장담하지 못하는 때일수록, 남보다 먼저 가치를 알아보는 안목과 그것을 끝까지 밀고 가는 확신이야말로 새로운 세계를 여는 힘이 된다. 정철훈 미술 칼럼니스트 - 고려대 문화콘텐츠학과 특임교수, 문화기획 프로듀서, 전 KBS아트비전 대표 가, 파리로 돌아온